한국 CCC는 1958년, 김준곤 목사에 의해 시작되었다. 풀러신학교에서 만난 빌브라잇 박사가 김준곤 목사의 간증을 듣고 감동하여 동역자가 되어 줄 것을 제안하였고, 이를 수락한 김준곤 목사는 한국에 돌아와 CCC 역사상 최초의 해외지부로 사역을 시작하였다.
1971년 1월 1일 0시 CBS 방송을 통한 민족복음화운동 선언 후 1만명이 참석한 가운데 ‘민족복음화 운동 요원 강습회’를 실시하였고.성시화 운동 등 ‘전 교회가 전 복음을 전 시민에게’ 라는 슬로건 아래 구체적인 복음화 운동들이 전개되었다.
‘민족의 가슴마다 피묻은 그리스도를 심어 이 땅에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자’ 1974년 8월 13일부터 18일까지 여의도 광장에서 개최된 Explo’74는 민족사와 정신사를 가로지르는 예수 혁명이요, 총천연색 성령의 잔치였다.
78개 국에서 온 3,407명의 외국 대표들을 포함하여 6일동안 323,419명이 등록한 최대의 합숙훈련이었으며, 연인원 655만 명이 참석한 최대의 전도 집회였다. 하루에 420만명 이상에게 전도하여 274만명 이상이 결실한 최대의 전도 실천 기록이 세워졌으며, 150만여 명의 참석자 가운데 약 70%가 성령충만을 확신한 최대의 성령충만 사건이기도했다. 마지막날에 모인 65만 명 가운데 90%가 헌신을 표시함으로써 이후 한국 교회의 폭발적인 성장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목사님은 평생 소박하나 열정적인 삶을 사셨다. 카타콤 같은 정동회관의 분위기를 좋아하셨다. 목사님은 책을 사랑하셨고, 다독가셨다. 당신 스스로가 많은 책을 지은 작가이기도 하셨다. 그의 언어는 선지자적 영감과 시적 감성이 넘쳤다. 그의 문체는 간결했고, 그 간결한 문체 속에서 감동으로 다가오는 수많은 책을 남기셨다.
그는 주님과 밀월 같은 사랑의 언어를 나누고, 다함없는 눈물과 사랑과 금식으로 기도하며, 민족복음화, 세계복음화를 꿈꾸었다. 우리의 영원한 청년 유성 김준곤 목사님의 숨결이 서려있는 이 작은 방에서 다시 한 번 새로운 꿈을 꾸자.
그의 삶에는 우리 민족사의 굴곡이 고스란히 흐르고 있다. 절망과 고통과 죽음의 문제 앞에서 그는 주님과의 지고지순한 사랑으로 묵묵히 살아냈다.
그의 인생이 주님의 손에 드려졌을 때, 민족의 아픔, 시대의 격랑을 고스란히 몸에 짊어진 채 살아온 한 사람의 인생을 주님께서는 위대하게 사용하셨다.
2차 세계대전이 지나간 자리 허무주의가 가득했던 미국의 대학가에서 캠퍼스를 품고 지상명령성취를 꿈꾸던 작은 거인 빌 브라잇 박사. 폐허 같은 조국의 현실 그 수난의 긴 터널 속에서 민족 복음화를 꿈꾸던 기도와 금식의 종 김준곤 목사.
두 거목의 만남은 꿈과 꿈의 역사적인 만남이었다.
시대의 부름을 받고 나선 믿음의 행보. 헌신의 제물로 드려진 그들의 믿음 그 거룩한 순종 남을 살리기 위해 자신은 죽고, 누군가의 기쁨을 위해 자신은 슬픔을 담당하고, 민족을 위해 스스로 고난을 짊어진 두 믿음의 두 거목 오늘, 이 자리에 나도 그들처럼 주님과 함께 서 있다.
김준곤 목사는 공산주의자들에게 겪은 개인적인 고통과 민족적인 아픔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북녘땅의 동포들에게 전하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북한젖염소보내기운동을 시작하였다.
북한 젖염소 보내기 운동은 “생존권이 소유권보다 우선한다.”는 성경적 원리의 실천으로 북한 동포가 최소한 굶어 죽지 않도록 도와야 한다는 취지 아래 시작되었다. 이 운동의 목적은 한국 교회가 사랑의 힘을 모아 본격적인 통일 준비와 나눔 운동에 들어가 국토 통일 이전에 사랑의 통일을 이루는 기반을 만들자는 것이다.
방금 울린 재야의 종소리와 함께 60년대가 70년대로 넘어오는 이 엄숙한 순간에 나는 나의 사랑하는 한국 교회와 함께 우리들의 지상과제인 우리 민족의 복음화를 위하여 비상한 헌신과 결심을 하고 싶습니다. 200만 기독교도가 총동원되어 전도로 민족의 혁명을 이룩하는 일보다 빠르고 좋은 남북통일의 길과 민족이 잘 사는 길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 김준곤 목사 <민족복음화운동 선언> 중에서 -
1962년 2월 중순 전국간사수련회를 마치고 오후에 나는 친구(박요한 목사) 누님인 박권사님이 운영하시던 움막같은 기도처에서 기도를 하였다. 그곳에서 나는 매일 민족복음화를 위해 기도했다. 지구상에서 단 한 민족이라도, 단 한 번만이라도 송두리째 복음화되도록 기도했다. 그때 했던 기도 내용을 요약정리 한 것이 [민족 복음화의 환상과 기도]이다.
오늘날도 활발하게 활동하는 국가지도자들의 대표적인 기도회가 두 개 있다. 하나는 1965년 2월 27일에 시작한 국회조찬기도회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조찬기도회이다. 3·1절을 앞둔 2월 27일, 김종필 당시 공화당 의장과 김영삼 당시 민중당 원내총무, 정일권 국무촐리등 20명 정도의 한국의 여야 국회의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제1회 국회조찬기도회가 있었다(구 조선호텔).
1966년 3월 8일 7시30분, 구 조선호텔 볼룸에서 제1회 한국 국가조찬기도회가 개최되었다. 미국의 기독교 지도자들(로빈슨 총무, 하버슨 박사 등 미국 ICL에서도 5명 참석)과 브라운 주한 대사 등 각국 외교 사절, 삼부 요인, 이효상 국회의장, 정일권 국무총리, 노기남 천주교 대주교 등 267명이 참석했다.
1968년 8월 23일부터 26일까지 영락 베다니 마을에서 전국 CCC 학사들 108명이 모여 수련회를 갖고 나사렛형제들이 창립되었다. 그때 나는 나사렛형제들이 민족 복음화를 위해 제3의 집단이 되어줄 것을 역설했다. 순은 가정과 교회 사이에 사회구조론적 생세포 사이에서 새로운 단원으로서 생세포 조직망을 통하여 기하급수적으로 전도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이를 통해 전국 59,000 자연 부락까지 사랑방운동을 통해 생세포적 전도와 순모임을 뿌리내리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군대 내 좌익 침투에 대한 우려를 갖고 나에게 군인들의 사상 무장과 정신 무장에 대해 자문을 구해 왔다. 그래서 나는 신앙전력화가 군대 내 반공 운동과 정신력 무장에 크게 도움이 될 거라며 전군신자화운동을 제안했다. 내 마음속에는 전군신자화운동이 전개되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질 것이라는 판단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전군신자화운동이 시작되었다.
1970년 12월 31일 0시, 재야의 종소리와 함께 나는 기독교방송(CBS)을 통해‘민족의 가슴마다 피 묻은 그리스도를 심어 이 땅에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자’는 ‘민족 복음화 운동’을 공식 선언했다. 그리고 민족 복음화 운동을 가속화해 나가기 시작했다.
1970년 12월 31일부터 1971년 1월 3일까지 수원 서울대 농과대학에서 450여 명의 평신도를 대상으로 ‘민족복음화운동 요원강습회’를 실시했다.
이어 1971년 8월 1일부터 5일까지 대전 충무체육관에서 1만여 명이 모여 한국 사상 최초, 최대 규모의 청년 학생 전도 강습회를 개최했다. 이후 민족 복음화를 위한‘민족복음화운동 요원강습회’는 전국적으로 계속 실시됐다.
전국 농어촌 면(面) 단위 교회 주일학교 교사 14,600명을 4박 5일간 전도 훈련을 실시하였다. 이후 민족 복음화를 위한‘민족 복음화운동 요원강습회’는 전국적으로 계속됐다.
전국 시범 교회 교역자 전도 훈련이 4월 10일부터 14일까지 본부에서 열렸다. 이어 전국 시범 교회 평신도요원 전도훈련강습회가 4월 24일부터 28일까지 본부 대강당에서 서울신학대생 123명을 포함, 총 404명이 참여하여 민족 복음화의 비전을 마음속에 새겼다.
민족 복음화 운동의 총체적 전략을 춘천시에 결집하여 민족 복음화 이전에 한 도시만이라도 완전 복음화를 이루어 보고자 하는 비전에서 시작되었다. 춘천 성시화운동은 한 마디로 민족 복음화 운동의 일환으로 시작한 것이다. 춘천 성시화운동의 모델은 칼빈의 제네바와 문준경 전도사의 대신 거지 모델이었다.
당시 한국 기독교 인구가 270만 명에서 300만 명 정도로 추산되었는데, 32만 3,419명이 등록하여 5박 6일 동안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밤에는 100만여 명이 모여서 집회를 하고 철야 기도를 했고, 낮에는 전도 훈련을 받았다. 1974년 7월부터 1975년 7월까지 임의 무작위로 전국 1,000 교회의 주보를 모아서 분석한 결과 110만 명의 교회 출석수가 증가하여 한국 교회 전체 33퍼센트가 성장했다. 헌금은 64퍼센트가 증가했다.
베트남이 공산화되는 등 불안한 시국에서 19명의 간사들과 함께 나라와 민족을 위해 40일간 금식 기도를 했다.
예수칼럼은 1979년 10월 1일부터 1981년 9월 말일까지 만 2년간 <조선일보>에 매일 게재되었고, 1979년 10월 1일부터 1980년 8월말일까지 <동아일보>에 매일 게재되었다. 한국 일간 신문에 기독교 칼럼이 연재되기는 예수칼럼이 처음이었다. 예수칼럼은 파스칼의『팡세』에 필적할만한 현대적인 고전으로 평가받으며 단행본으로 묶여져 최장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후 우리 민족이 여러모로 긴박하고 험난한 시련을 겪고 있는 중 한얼산기도원에서 구국 비상회개 금식기도운동을 전개했다.
나는 마지막 날 밤 헌신예배 때 한국 주도의 선교사 시대를 열 것을 역설하였다. 나는 참석자들에게 (1)외국 선교 위해 기도할 것, (2)선교 후원에 참여할 것, (3)대신 헌신할 것, (4)본인이 장 단기로 헌신할 것 등 4가지를 초청했다. 그때 10만 명의 젊은이들이 장 단기 선교사로 헌신하였다.
6월 5일부터 11일까지 영락교회에서 각국 교회 대표와 국내 교역자, 평신도 지도자, 부녀지도자 등 4,000명이 모여 국제기도세미나를 개최했다. 6월 6일부터 9일까지 뚝섬공원에서 70여 개국의 목회자와 성도들이 세계 복음화를 위해 금식하며 기도했다.
한국과 일본 목회자 각 300명씩을 초청하여 CCC 부암동훈련원에서 전도 훈련을 실시했다. 또한 개인과 민족을 위해 기도하고 자매결연을 맺어 한일 협력선교의 계기를 마련했다.
전세계 95개 도시 동시 위성 집회 및 한국 6개 도시에서 집회를 개최했다.
3천 명의 대학생 단기선교사 파송
한국 교회 최초이자 공식적으로 대학생과 평신도 단기선교사의 시대를 열었다. 지금은 많은 교회들이 단기선교 사역을 하고 있으며, CCC는 매년 3천여 명의 대학생들을 여름과 겨울 방학에 10여 개국으로 파송하여 단기선교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10만 대학생통일봉사단 입단식을 거행함
잠실올림픽주경기장에서 75,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대학생통일봉사단 입단 헌신서약식에서 대학생통일봉사단은 ‘한 손에는 복음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사랑을 들고’(쌍손선교) 북한 선교와 세계 선교에 헌신했다(서명자 수는 10만 명). 그 대회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4,000여 명의 지도자들도 함께했다
전세계 165개국 4,500여 명의 지도자가 참석하여 세계 선교의 전략을 논의했다. 3,000여 명은 숙식까지 제공했다.
1998년 12월 30일부터 1999년 1월 2일까지 서울 여의도 에어돔(중소기업 전시관)에서 3박 4일간 전국 331개 대학 CCC 회원 1만 2천여 명이 모여 민족의 위기극복과 한국 교회 부흥을 위한 금식 기도 성회를 개최했다. 이 성회에서 대학생 등이 헌금한 1억원을 불우이웃을 섬기는 10개 단체에 기탁했다.
인천기독교교단협의회와 공동으로 300여 개 교회 전도 훈련을 실시했고, 인천 시내를 행진하며 시민들에게 홍보 전단을 나눠 주며 성시화운동 캠페인을 전개했다.
2000년 7월 6일, 전국 350여 개 대학 1만여 대학생들이 굶주림에 처한 북한 동포를 돕기 위한 젖염소보내기운동을 결의하고 10,342마리(32억 원)를 작정했다. 그후 매년 젖염소를 보내고 있으며 2004년 5월 현재까지 53억이 작정되었고, 18억이 모금되어 2000여 마리의 젖염소와 착유 설비 등을 북으로 보냈다. 향후 10년 내에 북한의 190만 7천호 농가에 젖염소 한 마리씩을 보급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